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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운] 바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하나처럼 기도문을 읊었다. 마르티리오는 모았던 손을 가만 바라보다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꼭 감은 아멜리아가 밧줄이라도 쥔 듯 손을 모은 채 기도를 이어가고 있었다. 딴청을 피우던 눈이 원장 수녀와 마주하자 마르티리오는 흠칫 고개를 다시 숙였다.

 “아멘.”

 짧은 기도가 끝나고 마르티리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잠시 원장 수녀가 눈을 좁혔던 것 같기도 하다.

 “공지가 있어요.”

 학생들의 시선이 강단 위의 원장 수녀에게 향했다. 나이가 지긋이 든 원장 수녀는 안경을 추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곧 1학년 학생들은 수련회를, 2학년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가죠. 그 때문에 한 가지 주의를 하고 싶습니다. 몇 년에 한 번 수학여행에서 다쳐오는 학생이 생깁니다. 올해는 그런 일이 없도록 부디 주의하세요. 항시 기도하고, 지도에 잘 따르기를 바랍니다.”

 마르티리오는 비웃음을 지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학생들이 꽤 되었는지 곳곳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야유로 받아들였을까. 원장 수녀는 더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둘러보고는 강단에서 내려섰다. 마르티리오는 떠나는 원장 수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야에 걸린 아멜리아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아멜리아가 돌아보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왜. 다칠까봐 무서워?”

 미사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며 마르티리오는 자신의 팔을 잡아오는 아멜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아멜리아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불안한 표정을 했어. 입이 벙긋할 즈음 뒤에서 부반장, 하고 마르티리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티리오는 질문을 담아두고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유인물을 내미는 반장에게 인상을 써주었다. 한번쯤은 네가 하면 안 돼? 사나운 표정이었지만 무리에 속한 우두머리에게는 별로 먹히지 않는 위협이었다. 결국 마르티리오는 종이뭉치를 들고 먼저 교실로 향했다.

 수학여행에 관련된 안내장이었다. 마르티리오는 숫자에 맞게 종이를 세어 칠판에 가장 가까운 자리들에 올려두었다. 중간에 아멜리아나 다른 자리 주인이 세어가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뒷쪽에 있는 창가 자리에 앉아 제 것과 함께 빼둔 아멜리아의 것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안내장을 훑는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어떻게 하면 빠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지만 무위에 가까웠다. 인기 투표로 자리를 꿰차 팽팽 노는 반장이라면 모를까 담임 선생이 직접 일 좀 하라며 성적을 보고 앉힌 부반장이 자리를 비울 수 있을리가 없을테니까. 또 가서 애들한테 귀찮은 잔소리나 해야할 걸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아팠다.

 

 “섬이래. 마르티리오.”

 응? 아멜리아의 밝은 목소리에 마르티리오는 종이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네.”

 “바다 오랜만에 보겠다.”

 “바다 좋아해?”

 

 바다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말하며 웃는 아멜리아에 마르티리오는 불쑥 못된 마음이 들어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너? 설마!”

 “찝찝해서 싫어. 덥고. 애들은 시끄러울테고.”

 “그래도! 보기만 해도 시원할거야. 수평선을 보면 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던데.”

 

 되게 좋아하네. 아멜리아는 안 그런 것처럼 보여도 호불호가 확실했다. 마르티리오는 알았다며 웃으면서 작게 속삭였다.

 “너랑 둘이 가면 좋을 것 같긴 해. 적어도 시끄러운 건 덜 하겠죠.”

 작게 누른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마르티리오는 담임 선생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몸을 바로 하고 앉았다. 일단은 눈앞의 수학여행부터 해치우긴 해야했다.






 

 마르티리오는 그러나 수학여행에 가지 못했다. 그 전날부터 갑작스레 찾아온 몸살은 숨을 조일 듯이 거셌고 마르티리오는 풍랑에 휘둘리는 배처럼 침대에 고꾸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방에 머물었을까, 수학여행 기간이 끝나고서야 몸을 일으킨 그는 어쩐지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바짝 마른 입술과 목이 물을 찾기에 마르티리오는 몸을 일으켰다. 

 거실은 어두웠다. 불이 꺼져있어서도 그랬지만 날이 이미 저문 것 같았다. 마르티리오는 냉장고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곧 주말이니 며칠만 지나면 한껏 친해진 아이들을 보게 되겠지.

 핸드폰이 진동한 것은 잔을 내려놓을 즈음이었다. 마르티리오는 반사적으로 폰을 집어들었다가 문자를 보고 놀라 휘청일 뻔 하였다. 아멜리아였다. 그가 저희 집 문 앞에 서 있다는 내용이었다. 마르티리오는 조금 고민하다가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주었다.

 

 “마르티리오.”

 아멜리아는 며칠 전과 다름 없는 얼굴로 어쩐지 빵빵한 배낭을 메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마르티리오는 얠 어쩌면 좋나 싶으면서도 일단 안으로 들이려 했다.

 

 “잠깐만. …... 너 이제 괜찮은거야?”

 “꽤. 무슨 일이길래 전화로 안 하고 이 밤 중에 여기까지 왔어.”

 마르티리오의 잠긴 목소리가 낮게 현관에 울리고, 센서등이 잠시 꺼졌다가 마르티리오의 손짓에 도로 빛을 찾는 짧은 쉼 후 아멜리아가 말했다.

 

 “우리…… 바다 갈래?”

 “이 시간에 갑자기 바다? 너 설마 그래서 배낭 메고 온 거야?”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티리오는 아찔해져서 다시 아멜리아를 현관 안으로 들이려다가 저항에 못 이겨 인상을 팍 썼다.

 “안 들어갈래. 나 진짜 용기 내서 부모님께 허락도 안 받고 온 거란 말야. 지금 들어가면 너네 집에서 잠이나 자고 갈 것 같아.”

 “바다엘 다녀오는 것보단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한숨처럼 마르티리오의 목소리가 깔렸다가 그의 시선이 울상이 된 아멜리아의 얼굴에 닿았다.

 

 “너 바다 가고 싶어했잖아.”

 “그건…… 아니야.”

 “그냥. 기대했던 것 같아서.”

 

 근처 아무데라도 좋아. 바다만 보고 잠깐 있다 오자. 가느다란 미소를 띄우며 말하는 모습에 마르티리오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막차표를 간신히 구해 플랫폼에 앉은 두 사람은 급하게 산 빵을 하나씩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뜨끈하니 이 열대야에는 화롯불 같았는데도 마르티리오는 왠지 그 온기가 좋았다. 열차가 떠나려면 아직 20분이나 남아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기에 떠나는 사람은 적었다. 모든 세상이 조용했다.

 아멜리아도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그는 종종 마르티리오의 목에 메인 스카프를 만지작거리면서 감기를 걱정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마도 제가 끌고 왔기 때문이려나. 마르티리오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때마다 마르티리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음료병을 입에 대거나 빵을 먹었다.

 

 “갔다 오면 혼나겠지?”

 

 열차에 올랐을 때.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겠다 싶을 때에서야 아멜리아는 입을 열었다. 마르티리오는 저 아닌 척 소심한 친구가 겁이 잔뜩 오른 제 속내를 감추려 그동안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하지. 나 며칠 학교에 못 나오거든 그러려니 해.”

 “나도.”

 “후회해? 이제라도 집에 돌아가면 괜찮을 걸.”

 

 마르티리오로서는 배려로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몹시 자존심이 구겨진 표정이었다가, 마지막으로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해.”

 “그럼 좀 자둬. 내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테니까.”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인 아멜리아가 휴대폰을 꾹 쥐었다가 주머니에 넣고는 몸을 구기며 의자에 푹 파묻혔다. 마르티리오는 아멜리아가 양보한 창가자리에서 한참 어두운 밖을 바라보다가 열차가 느릿하게 출발할 즈음 아멜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는 손을 뻗어 아멜리아의 머리를 제게 기대게 했다.

 

 덜컹거리는 열차 좌석과 지독하게 어두운 창 밖 너머, 조용한 숨소리 사이에서 마르티리오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종점까지 달려가는 열차는 종종 멈춰섰지만 아멜리아는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마르티리오는 그걸 세 번쯤 겪고서야 아멜리아의 손을 가볍게 쥐고 눈을 감았다.





 

 열차는 한참 후에야 종점에 도착했다. 새벽 동이 틀 즈음이었다. 바닷바람이 아직은 들이닥치지 않은 열차 안에서 마르티리오는 손을 빼내고 아멜리아를 흔들어 깨웠다.

 

 “...... 도착했어? …… 아, 미안. 무거웠지. 기댄 줄도 모르고 잤어.”

 “괜찮아. 피곤했겠지. 긴장도 했을거고.”

 

 마르티리오는 휘청 일어나는 아멜리아를 붙들었다가 그가 중심을 잡자 아닌 척 놓아주고는 깨끔발로 머리 위의 짐을 내리려다가 키를 핑계로 금방 제지당해 도끼눈을 떴다.

 열대야라는 뉴스가 무성하게 바닷가 근처 역은 한기가 감돌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바다라는 걸 알려주듯 이정표가 크게 붙어있었고 역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르티리오는 배낭을 짊어지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바닷내음이 가면 갈수록 짙어졌다. 먼 곳으로 하얀 백사장이 보였다. 별 수 없이 들뜬 마르티리오가 아멜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이미 섬을 다녀왔다는 걸 깨닫고 저를 억누르려고 애써보는데 아멜리아의 입이 먼저 열렸다.

 

 “바다다……!”

 “잔뜩 보고 왔을텐데도 반가워?”

 “그럼? 너랑은 처음 보는 거잖아.”

 

 마르티리오는 그제야 마음 편한 웃음을 가늘게 지었다. 아멜리아의 손이 마르티리오의 손을 붙들었다. 마르티리오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이내 저를 이끄는 손길을 따라 다시 발을 떼었다.

 

 반짝이는 백사장에 새 발자국이 찍혀갔다. 파도는 일렁거렸고, 서늘한 바닷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마르티리오는 아마 아주 잊지 못할 바다 여행이 될 것이라고 속으로만 그렇게 조용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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