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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아] 회상: 딸들에게

0. 이 집의 모두가 알다시피 내가 이곳에서 일한 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다. 여러 명의 하녀가 이 집을 스쳐갔고, 나는 이곳에 항상 남아 있었다. 너희 어머니 표현에 따르면, 당연하게 말이다. 하지만 난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처음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에는 앙구스티아스가 아주 어린 꼬마였고, 곧 막달레나가 태어나는 걸 지켜보았다. 하나 고백할 게 있다. 너희 어머니가 미워서 나는 곧잘 너희가 못나고 어디 자랑할 데 없는 딸들이라고 험담을 하기도 했었다. 그건 너희 어머니를 욕보이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그만큼 너희 어머니가 미웠다. 그러나 밉기만 했다면 지금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겠지. 그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알고 있었다 해도 놀라지는 않겠다. 나는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도, 잊고 싶은 것도 모조리 잘 간직하고 있다. 그로 인해 슬플 때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갈 곳 없는 말들을 정리해서 전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1. 앙구스티아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젊었던 나는 귀를 의심했었다. 누가 제 딸의 이름을, 그것도 첫째 자식의 이름을 다른 의미도 아닌 ‘절망’이라고 짓는 건가. 너희 어머니는 항상 이해하기 힘든 인간이었고 이것이 그 많은 이해하기 힘든 순간 중의 첫번째였다. 그러나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니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었다. 태어나자마자 아비가 죽어서 상복을 입고 있던 그 어린 아이는 조용했고 제 어미 덕에 내성적으로 변했다. 대하기 어려운 자기 엄마보다 나를 더 쉽게 따르곤 했었지. 어느 날 앙구스티아스는 어린 아이가 중대한 비밀을 말할 때 다들 그렇듯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 위까지 끌어당긴 채로 소곤거렸다. 엄마가 자신을 가져서, 그리고 태어나게 해서 괴로웠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거란다. 동네 아이들이 앙구스티아스를 놀릴 때에도 다물고 있던 입이 어째서 자기 직전 가장 평온한 시간에 열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군요, 라는 대답 외에는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너희 어머니는 아마 앙구스티아스를 낳기 전후로 절망했을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엄마처럼 혹시나 잃어버릴까 제 곁에 딱 붙게 하고 그 작은 손을 꼭 붙들고 있던 것이 생생한데, 그것도 그 괴로움의 연장이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꼭 말하고 싶구나. 너희 어머니는 절망 속에 아이를 낳고 기른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2. 막달레나가 태어날 때에 내가 꼭 서른이었는데 이제는 막달레나가 서른을 넘겼구나. 너희 어머니가 재혼한 후 처음으로 아기를 가졌을 때에, 책을 자주 읽고는 했다. 항상 뭘 하고 있나 보면 책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성경이 대부분이었는데, 거기서 막달레나라는 이름을 고른 것일 테다. 그 인물이 좋다는 말도 했었다. 나는 명령대로 임산부에게 좋다는 것과 아기에게 좋다는 것은 다 찾아 대령했던 기억이 난다. 너희 어머니 입맛은 예나 지금이나 까다롭기 그지없다는 걸 다 알고 있겠지만, 그때가 가장 심각했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뱉어내고 나는 그걸 치우길 반복했다. 앙구스티아스를 가졌을 때 아무것도 몰랐던 것을 둘째 때 와서야 제대로 챙기겠다는 심산인 듯했다. 덕분에 나는 너희 어머니 수발을 드느라 손발이 부르텄지만, 그 고생이 보람이라 느껴질 만큼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가 태어났다. 울음을 삼키는 데에 익숙해져 있던 앙구스티아스와 달리 입을 크게 벌리고 토해내듯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고,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사고도 많이 치고, 책도 많이 읽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짐승들에게도 쉽게 관심을 보이는 꼬마로 자랐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좋아했지만 번번이 제 어미에게 가로막히고는 결국 앉아서 바느질을 했는데, 어린 것이 손재주도 어찌나 좋던지. 이 집안의 가족이든 하녀들이든 모두가 막달레나를 좋아했지. 자라날수록 어릴 때와 달리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침울해지는 일이 잦았는데 제 언니를 따라 그러는 줄 알았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됐지만.

 

3. 활기 넘치는 막달레나를 기르고 챙기느라 숨이 차던 차에 너희 어머니는 셋째를 가졌다. 이번에는 망아지 같은 활발한 딸보다는 얌전하고 귀여운 자식을 가지고 싶었는지 아멜리아라고 이름 붙였다. 과연 꿀(miel)을 머금은 이름답게 셋째 딸은 성정이 착하고 사랑스러웠으며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옥구슬 굴러가듯 또랑또랑했다. 노래라도 흥얼거리면 집안 사람이 다 귀를 쫑긋 세웠다. 특히 너희 할머니가 아멜리아의 노랫소리를 좋아했지. 할머니가 가끔 노래를 시키면 너희 어머니는 만류하다가도 결국 조용해지곤 했다. 항상 곧잘 눈치를 보던 아멜리아는 꼭 어른들을 번갈아 보다가 노래를 시작했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 번은 안락의자에 틀어박혀 식사도 거부하던 너희 어머니에게 가서 노래를 불러드리라고 시킨 일이 있다. 머뭇거리던 아멜리아는 결국 제 엄마와 내 눈치를 살살 보며 곧잘 부르던 동요를 불렀는데, 노래가 끝나자 천천히 일어선 너희 어머니는 셋째 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지나가 방으로 올라갔지. 혼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던 것인지, 아니면 엄마가 자신에게 칭찬을 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인지, 아멜리아는 해맑고 달콤한 미소를 한가득 짓고 두 손을 꼭 마주잡았다. 그 착한 성정대로 모든 자매와 두루 친하게 지냈고 얌전하게 어머니의 말씀도 참 잘 들었다. 키우는 입장에서는, 어찌나 고마운 아이였던지.

 

4. 너희 어머니가 넷째를 임신했을 때에는 비교적 순조로웠던 막달레나와 아멜리아 때와는 달리 자주 앓았고 잘 먹지도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만 발을 동동 굴렀지. 넷째부터는 원치 않았나 보다. 그것이 마음이든 몸이든, 어쨌든 원치 않았다는 것을 자신도 알았는지 아이는 어머니의 몸에서 빠져나오길 거부했다. 한 마디로 난산이었다. 비로소 태어난 넷째 딸을 보았을 때 너희 어머니의 얼굴은 새하얘졌고 두 눈은 시뻘개졌다. 앙구스티아스 때보다 훨씬 약하고 작게 태어난 아이를 보며 덜컥 겁이 나고 불안했겠지. 너희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떠나보내듯이 나에게 넘겨주면서 그 아이가 잘못될 것 같으면 바로 자신을 깨워서라도 말하라고 명령했다. 드물게 들어보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그게 무슨 불길한 말이냐고 하는 나를 무시하고 너희 어머니는 기절하는 것처럼 잠이 들었다. 한참 동안이나 이름을 짓지 못했다. 아이를 갓 낳았는데도 아이의 이름이 없는 그 시간 동안 잘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보다 못한 너희 할머니가 넷째 아이를 한번 안아보고는 태어나기 위해 이미 한 차례 무언가를 희생한 아이이니 마르띠리오가 좋겠다고 말했다. 너희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띠리오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뒤에서 빤히 바라보며 노심초사하는 눈빛을 숨기는 데에 실패한 너희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마르띠리오가 어릴 때 놀림당하고 상처받으면 너희 어머니는 역정을 내서라도 똑같이 상처를 돌려줘야 직성이 풀렸다. 어린 마음에 그것을 저도 모르게 닮았던 것일까 가시 돋친 말을 잘하는 아이로 자랐구나. 이제 와서야 너희 어머니도 여느 많은 어미 같을 때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한 과거가 모든 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5. 아델라. 빛나는 그 이름과 반대로 그 아이가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마르띠리오가 나오는 것보다 더한 고생이 필요했다. 너희 어머니가 막내 아이를 가졌을 때 나이가 벌써 마흔이 다 되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엄마도 아기도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 상태였지. 너희 어머니는 또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노산인데다 바로 앞서 난산을 겪었으니 이번에는 정말로 아기가 잘못될 것이라고 여겼다. 보름에 한 번씩은 낳아도 금방 죽을 거라는 둥 내가 이 아이를 낳았는데 아프면 엎어 놓으라는 둥 마음에 있지도 않는 듯한 말을 해대며 내 간담을 후벼 팠다. 너희 어머니가 임신해서 말을 못되게 뱉어도 듣는 말은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막내야말로 가장 고귀한 아이로 태어날 것이라는 위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 언니와 달리 열 달을 꽉 채우고 또 만 하루를 써서 태어난 막내 아이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너무도 건강하였고 참으로 어여쁜 아이였다. 어찌나 예쁘고 제 부모를 쏙 빼다 박았던지 나까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미 여러 번이나 태어나는 아이를 받아 본 경험이 있었는데도 마치 처음 아기를 받아 봤을 때처럼 온몸이 떨렸다. 나는 그때 거의 이십 년 만에, 마치 처음인 것처럼, 너희 어머니의 굵은 눈물 방울을 보았다. 아기를 건강하게 낳아 기쁜 것인지, 나이가 다 들어 다섯째까지 낳아 막막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몸이 힘들어서 절로 눈물이 난 것인지, 또는 그 전부인지 알 수는 없었다. 태어난 그 아이를 안고 곧바로 고귀하다는 그 이름을 붙여 주며 닦은 그 눈물을 똑같이 이십 년 뒤에 또 흘리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것도 또 그 아이 때문에. 

 

0. 베르나르다를 반평생 넘게 보아 오면서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라고 말할 수 있다. 좋든 싫든 그 오랜 세월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이 마을 사람들처럼 대대로 이곳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려고 나를 이용해서 다른 집안의 약점과 소문을 꽉 잡고 놓치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그에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딸들조차 규칙이란 명목 아래 쥐고 흔드는 사람이니까. 그 이름이 곰처럼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나?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의 이름값을 꽤나 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숨기고, 또 아닌 척 뒤에서 노리면서. 그 긴 세월 동안 제 남편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으니 여우처럼 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겠다. 그러던 베르나르다가 남편을 죽인 날 밤, 간신히 비명을 삼키고 고개를 돌리던 내 뺨을 붙들고 자신과 시체를 보도록 돌려세우는 그 손아귀 힘을 느끼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 여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겠다고. 그리고 너희도 그럴 것 같다고 그렇게 잠시 생각했었다. 미안하다. 나는 너희가 너희 어머니의 지붕 아래에서 숨 막히게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날개가 잠깐 꺾였다 해도 눈과 귀는 똑똑히 열고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건 너희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그랬듯이. 너희는 너희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내가 그의 용서를 대신 구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거의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일 텐데, 떠나기 전 알고 있었으면 해서 말한 것뿐이란다. 바로 앞에서 말했듯 눈과 귀를 똑똑히 열고 사실을 받아들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나와 너희 어머니가 극적으로 변하기를 기대하지는 마라. 다만 기억해 주길 바란다.

 

딸들에게, 폰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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